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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0년대] 화려하게 데뷔해 20년 넘게 사랑 받고 있는 양파

지난 2016년 5월 MBC 음악예능 <복면가왕>에는 '신비한 원더우먼'이라는 출연자가 등장했다. 원더우먼은 '정의의 세일러문(배우 황승언)'과 함께 자우림의 <하하하쏭>을 불러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를 거두고 2라운드에 진출했다. 원더우먼은 '밤의 제왕 박쥐맨(가수 이현우)'와 대결을 벌였던 2라운드에서도 파격적으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선곡해 파워풀한 음색을 뽐내며 3라운드에 진출했다.

3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는 1,2라운드에서 윤도현의 <너를 보내고>와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불러 슬리피와 김현숙을 꺾고 올라온 '슬램덩크(가수 김태우)'였다. 원더우먼은 신나는 곡을 불러 흥을 올렸던 1,2라운드와 달리 3라운드에서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선곡하는 '정공법'을 들고 나왔고 자신의 실력을 확실히 선보이며 슬램덩크를 7표 차이로 꺾고 가왕전에 진출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가왕전에서 만난 상대가 <복면가왕> 역대 최고의 가왕으로 꼽히는 '우리 동네 음악대장(가수 하현우)'이었다. 그리고 또 '하필이면' 원더우먼을 상대로 고른 노래가 음악대장의 역대급 무대 중 하나로 꼽히는 티삼스의 <매일매일 기다려>였다. 원더우먼은 아쉽게 가왕 등극에 실패했지만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누구보다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그 주인공은 바로 데뷔곡으로 음악방송 17관왕을 차지했던 1990년대 전설의 여고생가수 양파였다.

데뷔곡으로 지상파 올킬한 무서운 여고생 가수

▲ 양파는 데뷔곡 <애송이의 사랑>으로 지상파 3사를 포함해 음악방송 17관왕을 차지했다. ⓒ 한국음반산업협회
유희열이 곡을 쓰고 이적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10집 앨범 <조조할인>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누리던 이문세가 가요 프로그램을 휩쓸던 1996년 11월, 한 여고생 가수의 데뷔 앨범이 발매됐다. 이름은 들으면 웃음부터 나오는 '양파'. 양파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미였다.

활동명은 세련돼 보이지 않았지만, 양파 1집에 담긴 노래들은 결코 촌스럽지 않았다. 양파는 타이틀곡 <애송이의 사랑>을 통해 솔리드의 김조한이나 가능할 법한 수준 높은 R&B창법을 구사했다. 특히 'We can reach the other side, if we hold on to the passion'으로 이어지는 수려한 영어 발음은 '혹시 양파가 김조한처럼 해외파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사실 양파는 대구 출신이다).

<애송이의 사랑>은 H.O.T.의 '캔디 열풍'이 휩쓸고 지나간 1997년 봄 지상파 가요 프로 3사의 왕중왕을 싹쓸이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양파는 원활하게 가수 데뷔를 준비하기 위해 대구 혜화여고에서 중경고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양파는 후속곡 <천사의 시>까지 히트시키며 1997년 최고의 신인 여성가수로 자리를 굳혔지만, 그는 가수이기 전에 고3 수험생이었다. 최근 일찍 데뷔하는 아이돌들 사이에선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수능시험을 치르지 않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고3 수험생이 수능을 안 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양파는 많은 언론과 팬들의 기대 속에 1998학년도 수능 시험을 치렀지만 2집 준비로 인한 과로와 수능 스트레스 때문에 시험 도중 급성위염으로 쓰려지면서 시험을 중도포기하고 말았다. 건강을 회복한 양파는 1998년 초 <알고 싶어요>가 수록된 2집을 발표해 활동했지만 마이키를 영입하고 3집을 발표한 터보와 양파 2집과 활동시기가 겹친 대형신인 걸그룹 S.E.S.로 인해 1집 만큼 큰 인기를 끌진 못했다.

양파는 2집 활동을 짧게 끝낸 후 1년 넘게 활동을 중단했고 그 사이 S.E.S.와 핑클로 대표되는 걸그룹 문화는 빠르게 대중가요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진주, 박기영, 박정현 등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여성 솔로가수들이 대거 데뷔하면서 양파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교포 출신으로 '본토 R&B'를 구사하는 박정현의 등장하면서 양파의 시대는 빠르게 저무는 듯했다.
기교 덜어내고 감성으로 채운 양파의 3집

▲ 양파는 3집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담으며 한층 완성도 높은 앨범을 선보였다. ⓒ 한국음반산업협회
R&B 가수로서 재기가 쉽지 않을 거라던 1999년 6월, 양파는 세 번째 앨범을 들고 조용히 컴백했다. 조정현의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와 원미연의 <이별여행>, 임재범의 <너를 위해> 등을 만들었던 작곡가 신재홍이 프로듀서로 앨범을 제작했고 가수로 더 유명한 김현철, 이승환, 그리고 조규만-조규찬 형제 등이 양파 3집의 작곡가로 앨범에 참여했다.

양파 3집의 가장 큰 특징은 양파를 대표하는 수식어였던 'R&B'의 색깔을 상당부분 덜어냈다는 점이다. 양파는 1,2집에서 선보였던 기교를 최대한 덜어내고 그 자리에 한결 풍부해진 감성과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채워 넣었다. 덕분에 양파 3집의 완성도는 1,2집에 비해 더욱 올라갈 수 있 수 있었다.

양파 3집의 타이틀곡은 <아디오>. <애송이의 사랑>과 <알고 싶어요>가 소녀가 느끼는 첫사랑의 풋풋한 감정이나 짝사랑의 아픔을 노래했다면 <아디오>는 성숙한 여인의 이별을 이야기하는 곡이다. '그대가 날 보내고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그대 맘에 묻어 두려 했다는 걸'이라는 가사가 노래의 슬픔을 극대화하는, 양파를 대표하는 발라드 명곡이다.

사실 처량한 걸로 치면 '20세기 김이나' 윤사라와 양파가 함께 가사를 쓴 <오늘만>이 압권이다. 시작부터 처량한 일렉트릭 바이올린 소리로 출발하는 이 곡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기 직전의 복잡한 감정을 노래한 곡이다. '언젠가 우리 이별을 모르는 한 친구가 궁금하듯 그대 안불 묻겠죠 뭐라 해야 하나요? 그댈 믿고 영원을 꿈꾸던 바보였다 할까요'라는 처절한 가사를 최대한 억누르며 담담하게 부르는 것이 이 노래의 포인트다.

그렇다고 양파가 언제나 이런 가사의 노래만 부른 것은 아니다. 윤사라-조규만 콤비의 <애이불비>는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고 해놓고 뒤늦게 후회하는 여자의 마음을 담고 있다. 복잡한 기교 없이 슬픈 감정을 서서히 끌어 올리는 양파의 성숙한 보컬을 들을 수 있는 노래로 <아디오> 이후 별다른 후속곡 활동이 없었던 양파 3집에서 <그녀 안의 나>와 함께 실질적인 후속곡으로 쓰였다.

양파는 3집을 통해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면서 음악적 변신을 시도했다. 대표적인 곡이 조규찬이 만든 <나쁜 혈통>이다. 양파의 음악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록비트가 강하게 들어간 곡이지만 크게 어렵거나 실험적이진 않다. 오히려 한 번만 들으면 'YOU&'가 반복되는 중독성 있는 후렴구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양파가 공연을 위주로 하는 가수였다면 공연 막바지 흥을 끌어 올릴 때 요긴하게 쓰였을 곡이다.

양파가 직접 작사에 참여한 <요술공주>는 재미 있는 가사와 양파의 통통 튀는 보컬이 돋보이는 댄스 넘버의 신나는 곡이다. 이 곡은 2004년 데이라이트가 데뷔 앨범에서 리메이크해 장진 감독의 영화 <아는 여자>의 OST로 쓰이기도 했다. 양파가 공동 작사가로 참여하고 이승환이 작·편곡한 <나비의 비행>은 새 장 속을 벗어나 꿈을 향해 날아가는 소녀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노래다.

이 밖에 헤어진 사람을 못 잊는 남자를 짝사랑하는 노래 <그녀 안의 나>와 이승환과의 듀엣곡 <그대 아니었다면>, 양파의 자작곡 <지구에서 보낸 한 철> 등 양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노래들이 대거 수록돼 있다. 하지만 양파의 3집 활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가수 활동으로 인해 대학진학을 하지 못했던 양파는 3집 앨범 활동을 이르게 끝내고 버클리 음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여성가수 4대 천왕 '박소양거'엔 양파가 있다

▲ 양파는 2010년대 중반 이후 <나가수3>,<복면가왕>,<불후의 명곡> 같은 경연프로그램에 출연해 좋은 노래를 들려줬다. ⓒ MBC 화면 캡처
양파는 버클리 음대 유학 중에도 베스트 앨범 형식의 3.5집 '버클리에서 온 편지'를 발표했고 2001년에는 4집 'Perfume'을 발표해 타이틀곡 < Special Night >을 히트시켰다. 4집 발표 직전에는 같은 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동률 2집에서 듀엣곡 <벽>을 함께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양파는 2000년대 초반 소속사와 분쟁에 시달리며 버클리음대를 졸업하지 못했고 가장 화려할 수 있었던 20대 시절에 무려 6년이라는 긴 공백 기간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양파는 2007년에 발표한 5집 <사랑...그게 뭔데>를 크게 히트시키며 건재를 과시했다. 이후 양파는 미니 앨범과 OST 위주로 간간이 활동을 이어나갔고 5집 이후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규 앨범을 내지 않았다. 양파가 2015년 <나는 가수다3>에 캐스팅됐을 때 청중 평가단이 양파를 '숨어 있는 가수'라고 표현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5집 활동 이후 다시 수 년 간 두문불출하던 양파는 2015년 <나가수3>를 통해 활동을 재개했고 가왕에 선정되면서 대중들로부터 최고의 보컬리스트로 인정 받았다. 양파는 이후 <복면가왕>과 <불후의 명곡> 같은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해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렸고 2018년부터 작년 8월까지는 약 2년 간 KBS 제2라디오의 <양파의 음악정원>을 진행하기도 했다.

양파의 노래 제목에는 유독 '알다'라는 동사가 많이 들어간다. 2집 타이틀곡은 <'알고' 싶어요>였고 3.5집 타이틀곡은 <다 '알아요'>였으며 5집 후속곡의 제목은 <그대를 '알고'>였다. 올해 가수 데뷔 25년 차로 좋은 노래가 뭔지 '아는' 가수가 된 양파는 남자가수 4대 천왕 '김나박이(김범수-나얼-박효신-이수)'에 대응하는 여성가수 4대 천왕 '박소양거(박정현-소향-양파-거미)'에 이름을 올리기 전혀 부족하지 않은 최고의 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