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 노래를 참 잘했던 여가수가 한 명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호소력 있는 창법과 안정된 음색으로 R&B에 기초한 애절한 기조의 발라드를 불렀다.
대중성과 가창력을 두루 지닌 이 가수의 음반은 발매되자마자 단숨에 각종 음악차트 상위에 랭크됐으며,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녀의 노래 '애송이의 사랑'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정도로 강한 자취를 남겼다.
공부도 꽤나 잘한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고3의 중압감으로 가수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가수로도 학생으로도 수 차례 1등을 차지하며 많은 이들의 시샘 어린 부러움을 샀었다. 요즘에야 데뷔 연예인들의 평균연령이 낮아져 학생 가수가 그리 새로울 것 없지만 그때로서는 양파의 등장이 센세이셔널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던가. 이 특출한 가수는 평범한 여고생으로서 겪어내기 힘든 일련의 사건에 맞닥뜨려야 했다.
'왕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그가 순탄한 학교생활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들이 많았음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대중의 관심과 집중된 시선에 대한 중압감도 컸을 것이다. 그녀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던 중 위경련과 맹장염으로 갑작스럽게 실려 나왔어야 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2,3집을 냈다. 탁월한 실력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냈다. 발매하는 앨범마다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고 독특한 그녀의 음색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속사와의 문제로 앨범을 낼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돌연 우리의 곁을 떠난다. 세계적인 명문으로 잘 알려져 있는 버클리 음대 입학 통지서를 쥐고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음악을 기본부터 다시 다질 수 있는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많은 시련이 있었다. 그렇지만 타고난 그녀의 실력이 말해주듯, 천성이 가수인 그녀는 곁길로 샐 틈이 없었다. 한 사람의 가수로, 한 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지만 음악에 대한 그녀의 삶에 대한 소망과 열정이 있었기에 위기도 기회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그녀의 노래를 듣던 어린 팬들은 어느새 20대가 되고 30대가 되었다. 흐른 세월만큼 연예계도 세상도 달라졌다.
소녀에서 어느새 여인이 된 양파가 조심스럽게 우리 앞에 다시 섰다. 동그란 눈매나 야무진 이목구비는 그대로인데, 수줍은 듯한 미소나 한이 서려있는 듯한 애절한 그녀의 감성은 더욱 깊어졌다.
컴백 후 양파는 줄곧 노래만 불렀다. 가창력 있는 가수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그녀가 돌아온다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그녀의 등장에 화려한 쇼는 없었다. 하지만 그 동안 무대에 서지 못해, 대중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못해 쌓여왔던 목마름이 그 안에 응축되어서일까. 더욱 애절하고 감동적인 '사랑, 그게 뭔데'를 선보였다.
2~3년만 공백을 가져도 급속히 망각되는 가요계의 흐름을 감안하면 6년 만에 등장한 양파의 성과는 이례적이다. 앨범 출시 2주 만에 온라인 음악 사이트 정상을 차지하는가 하면 온-오프라인 음반 판매량도 압도적이다. 그 동안의 공백이 무색하리만치 왕성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양파. 노래 잘하는 가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요계에 양파의 등장은 그야말로 희소식이다.
컴백을 준비하는 동안 녹음실에서 한 곡, 두 곡 사람들에게 들려줄 노래를 짓고 또 부르면서 스스로와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해냈을 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해가 뜨기 전 하늘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한 시간들이 오늘의 성과를 이뤄냈으리라.
또한 양파와 같이 실력 있는 가수의 성공적인 재기는 관대한 대중과 우리 가요계 아직은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시간을 돌아서 서게 된 무대 인만큼 이제 좀 더 편안하고 여유롭게, 그리고 오래도록 그녀의 음악을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란다.
김민성 ㈜MTM / 서울종합예술학교 이사장 www.sac.ac.kr